휴식
3일을 내리 쉬었더니 얼굴빛이 달라졌다. 오랜만에 이리 뽀얘진 얼굴을 보는 것 같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다 내려놓고 쉬는 것도 방법인 듯.
유홍준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97년 가을 지은과 떠났던 땅끝마을 여행이 새록새록 기억난다.
어학연수 막 마치고 들어와 여행의 묘미를 처음 알게 된 후 시도한,
국내에서의 첫 여행다운 여행이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오전 8시쯤 되었던가, 아직 새벽 흔적이 남아있던 대흥사 초입과 절까지 이어진 우거진 숲길.
절 입구 오른편 사리탑과 비석, 그위에 끼인 푸르스름한 세월의 흔적. 미니어처 같은 불상이 신기하기만 했던 천불전.
전날 히치하이킹으로 차를 얻어타고 갔던 고산 윤선도 고택,
밤차로 내려간 고단함에 생라면 하나를 부숴먹고 저녁 6시부터 12시간을 내리 잤던 해남유스호스텔,
물 한병도 챙기지 않은 무모함으로 오른 두륜산에서 탈진했던 기억,
내려오자마자 버스정류장 앞 매점에 들어가 미친듯이 과자며 음료수를 사들고 나와 평상에서 허겁지겁 해치운 기억.
허기가 가시고 제정신이 돌아오자 그제사 서로 얼굴을 보며 한바탕 웃어제낀 기억.
두륜산 대흥사 편을 읽으며 하나 하나 기억이, 그때의 느낌이 떠올랐다.
1박2일에서는 떠올릴 수 없었던 기억.
활자로 된 묘사를 따라가며 머릿속에 나만의 영상이 펼쳐졌다.
그 기억이 너무 좋아 몇장을 인화해 수첩에 붙이고 다녔었는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길이 없다.
몇년전 가족과 다시 찾은 대흥사와 두륜산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나를 탈진하게 했던 두륜산 정상은 이제 케이블카로 너무 편하게 오를 수 있게 되었고..
아.. 두륜산 정상.
힘들게 힘들게 정상에 올라보니,
내가 올라온 뒤쪽으로는 육지가, 정상에 올라 앞으로 내달으니 저 너머에는 바다가 있고,
그리고 억새가 우거진 정상 산꼭대기에는 내가 서 있었더랬지.
마치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이번에 답사기를 다시 읽어보니 땅끝 가는 길이 "아름다운 산경(山景), 야경(野景), 해경(海景)"을 보여준다 했는데,
지금 내 기억에는 두륜산 정상이 바로 그랬던 것 같다.
아, 괜히 책읽다 말고 옛날 기억에 빠져 잠시 감상적이 되었다.
뽀얘진 피부 유지를 위해, 이제 딴짓 그만하고 자야지.
매일매일이 오늘처럼 꽉 채워진 느낌이었으면 좋겠다.
'나'로 채워진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