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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테마

[여행]지리산/전주

요 근래 무얼 해도 허전하고 꽉 채워지지 않는 느낌에 불만이었는데, 조금은 겁내며 출발했던 이번 여행에서는 무언가 꽉 찬, 충만한 느낌을 안고 돌아왔다. 좋은 사람들, 맛있는 음식들, 그리고 기막힌 타이밍.. 모든 게 잘 맞아 떨어졌다. 사실 출발전까지만해도 망설였다. 평일에 이틀이나 휴가를 내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비까지 온다 하고, 컨디션도 그닥 좋지 않았고. 가지 않을 여러가지 핑계를 생각하다가, 그래도! 라는 마음으로 감행해 버렸다.

 

 

1. 기억나는 사람들..

 

둘레길 모녀.

3코스 초입에서 만난 두분과 인연이 되어 그날밤 숙박부터 다음날 3코스 종점까지 함께 했다. 두 사람 덕분에 중간 중간 쉼터에서 간식도 챙겨먹고, 1박2일팀이 쉬어갔다는 황토방에서 뜨끈하게 1박하고(저렴한 비용으로) 맛난 지리산 흑돼지 구이까지 잘 먹었다. 막걸리 좋아하는 딸래미 덕분에 중간 중간 막걸리 한잔 먹고 벌개진 얼굴로 산행까지 ㅎㅎ. 이튿날 3코스 종점에서 헤어져 나는 4코스로, 어머니는 서울로, 그리고 딸래미는 봉하마을로 각각 제 갈 길을 떠났다.

 

4코스에서 만난 함양시내버스 기사 아저씨.

4코스 초반 욕을 욕을 하며 걸었다. 내가 생각했던 길이 아니었다. 2시간을 X고생하고 드디어 편한 길이 나왔는데, 흙길이 아니라 아스팔트. 걷는 의미가 없다싶어 지나가는 첫번째 차를 무조건 잡겠노라 하고 걷다가 SUV를 만났다. 눈이 마주치자 마자 흔쾌히 차를 태워주셨다. 알고 보니 휴가내고 낚시하러 온 그 지역 버스 기사 분이셨다. 아저씨랑 은지원이 쉬었다 갔다는 세동마을 할매집에서 션한 콜라 한잔 마시고, 그 집 할머니와 그 아들까지 모두 동행해 아저씨 차로 함양 시내까지 나왔다. (그 시골이니까 가능한 거겠지..?)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까지 엄청 절약하고 함양분들이 자랑해 마지 않는 '함양상림'에 떨궈 주셔서 절약된 시간동안 천년 정원을 거닐었다. (딱딱한 등산화 신고 ㅠㅠ) 지역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고, 그 만큼 그 지역을 찾은 이들에게 친절한 듯 보였다.

 

전주 남부시장 현대옥에서 만난 중년 부부.

매운 맛을 시켜 놓고 쩔쩔매는 내게 나가다가 보이는 찻집에서 1000원짜리 식혜와 냉커피를 맛보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뜨거운 콩나물국밥을 먹고 그 옆 찻집(은혜 휴게실)을 기웃거리니 거기 앉아계신게 아닌가. 시간이 꽤 지났는데, 주인이 안 계셔서 기다리는 중이란다. 30년을 현대옥 단골인데, 여기 냉커피를 먹지 않고 가면 허전하시다나 뭐라나.ㅎㅎ 식혜 먹으러 왔다니 아주머니께서 그건 나도 할 수 있다며 직접 식혜를 꺼내 따라주셨다. 그리고 나중에 사장님이 오시니 내 차값까지 계산을...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정말 감동이었다. 나중에 냉커피도 양이 많다며 맛보라고 나눠주시고.. 다리가 넘 아파 자전거를 빌리고 싶어하니 여기저기 전화해서 알아봐 주시고, 정말 친절한 분들이었다. 그 부부와 사장님이 나누는 투박한 대화가 넘 재밌어서 나도 자리 깔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그밖에...

등구재 황토방 식당 사장님과 도사님(티벳 여행 얘기로 한참 수다를 떨었다), 전주에 전망 좋은 카페를 추천해준 최명희 문학관 안내소 젊은 여자분(역시 여자들끼리 통하는 코드가!), 전주 유스호스텔 비빔팝 사장님.. 비빔팝 사장님은 도움이 필요할 땐 도움을, 적당히 모른척 해줄 필요가 있을 때는 모른 척 해주는 센스가 있으신 분 같았다.

 

 

2. 둘레길

 

둘레길은 올레길과 사뭇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정말... 등산이라는. 솔직히 그렇게 등산을 할 거면 차라리 지리산 종주를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도 둘레길을 걷는 내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 지리산의 풍광은 오래오래 남을 것 같다. 내가 꼽는 3코스의 백미는 상황마을 다랭이논과 등구재를 넘은 이후부터 창원마을 구간. 다랭이논은 1박2일 덕분에라도 너무나 잘 알려졌고, 등구재 이후 창원마을까지 코스는 시멘트 길이라는 게 많이 아쉽고 그것 때문에 실망하는 사람들도 많은 모양이다. 하지만 시멘트 길이라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온통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주변 풍광이.... 잘 묘사를 못하겠는데 예전에 내변산 산중에서의 느낌과 비슷했다. 산중간에 있을 법하지 않은 낯선, 편안한 넓찍한 길과 주변 풍광의 언발란스함이랄까.. 여튼 좋았다.

 

다시 말하지만 4코스는,, 정말 욕을 욕을 하며 걸었다. 아, 하천 길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생각하고 갔는데, 초반은 완전 한 사람이 겨우 지날 만한 산길이고(오르락 내리락). 그 길을 지나면 걍 아스팔트 도로다. 차도 옆으로 지나다니는.. 아웅..

 

 

3. 전주

 

비가 온다는 예보에 둘레길 걷기를 포기하고 간 전주. 이번에도 전주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처음 갔을 때 인상적이었던 전주향교와 최명희 문학관, 현대옥을 다시 찾았다. 첫번째와는 또 다른 느낌이.. 현대옥은 할머니께서 은퇴하시는 바람에 맛이 좀 변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콩나물국밥하면 현대옥이라고, 30년 단골 아저씨가 말씀해 주셨다. 이번 여행에서 새로 도전한 음식은 순대국밥. 남문시장 피순대도 엄청 유명하더라. 30년 단골 아저씨가 추천해주신 조점례 남문 피순대에서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국밥을 시켰는데 순대가 똘랑 3조각밖에 없고 온통 내장이라 조금 실망했지만, 신기한게 국물이 식을 때까지 전혀 느끼하지 않았다. 피순대는 다른 순대보다 선지를 더 많이 넣은 거라고 하는데, 국밥 속 순대로 추측해 보건데 좀더 촉촉한 느낌인 듯 하다. 담에는 순대도 따로 시켜먹어봐야지 다짐했다. (별 다짐을 다 해..;;)

 

최명희 문학관에서는 1년후에 부쳐준다는 편지를 쓰고 왔다. 그 편지를 받을 즈음,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편지에 쓴 것처럼 정말 따뜻한 사람이 되어 있을까?